대학을 졸업하고 일산병원에 입사한 나는 응급실 근무를 발령받았는데, 사람도 낯설고 의료 기구도 익지 않고 모든일이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그날 전기톱에 손이 잘린 대박환자(생명의 위습을 다투는 정도의 응급환자)가 피를 사방에 뿌리며 도착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호흡곤란 증세가 나서 산소호흡을 받았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진정된 후 다시 간호사로 돌아가 환자를 돌보긴 했지만 출근 첫날 응급실 근무 8시간은 너무나 길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병원이 문을 닫는 공휴일 나들이 인파가 많은 만큼 사고가 많았는데 오전부터 환자들이 몰리기 시작했는데, 가장 많은 환자는 교통사고환자, 이외에도 심장마비, 복통, 두통, 외상환자 등 갖가지 질환의 환자들로 넘쳐 나 오후엔 응급실 침대가 모자라 바닥에 환자를 눕혀 놓고 치료를 해야할 정도였다. 잠시도 숨 돌릴틈 없는 상황이, 아직 초짜 티를 벗지 못한 나에게는 응급실은 병원이 아니라 전쟁터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어 대박환자가 도착했는데 자전거를 타다가 트럭에 치여 트럭 바퀴에 다리가 끼어 하얀 벼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상태였다. 1분 1초에 환자의 운명이 바뀔수 있는 상황에서 의사의 처바과 선배 간호사들의 주문은 쉴 새 없이 계속되었지만, 신참인 나는 아무리 몸을 빨리 움직여도 '빨리 빨리'에 정확히 응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환자는 피를 서른개나 수혈받은 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쉴틈도 없이 바닥에서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와 다른 환자 가족들의 빗발치는 항의와 재촉으로 다시 속도전이 시작되었다 그날 하루에 응급실을 거쳐간 환자는 200여명이 훨씬 넘었다.
한마디로 '눈썹 휘날리게' 뛰어다닌 날이었다.
그런데 대박 환자보다 더 어려운 경우도 있다. 전날 갑자기 숨을 쉬지 않아 응급실에 실려 온 할아버지가 다음날 출근해 보니 이미 숨을 거둔 상태. 나에게 맡겨진 업무는 숨을 거둔 할아버지를 영안실로 옮기기 전에 치료에 쓰인 기구들을 모두 제거하는 일이었다. 아무도 없는 방, 시체에서 산소 호습기와 소변줄을 제거해야 한다니, 난생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기에 너무나 무서웠다. 마음속으로 '지금 이 앞에 누워 있는것은 시체가 아닌 환자' 라는 주문을 끊임없이 외우면서 겨우 기구를 제거할 수 있었다.
신규 간호사의 훈련은 엄격하고 빡빡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간호사의 일 자체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것이므로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물론 처음부터 신규 간호사 혼자 간호를 하는것은 아니다. 3개월 수습기간에는 프리셉터 제도가 이루어져 신규 한명당 담당 선배를 배치 해 실무를 배우게 한다. 근무가 끝난 후 테스트를 통해 응급실에 자주 쓰는 약 이름, 약의 생김새, 의학 용어, 질환별 세트 준비요량 등을 익히시도 한다. 그러나 신규라고 해서 환자를 전혀 돌보지 않을 수 없고 신참이기 때문에 실수도 할 수 있다는 너그러움은 병동 어디에서도 통하지
않는다.
신규 간호사들은 선배 의료진들이 자신이 환자를 간호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때 긴장감은 극에 달한다. 응급실에서 일하는 간호사 숫자는 대략 20여명. 20여명 모두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환자에게 히스토리(병력)를 물을 때도 '혹시 쓸데없는 질문으로 시간을 끌지는 않을까.' '방향을 잘못 잡아 환자 상태를 정확히 파악 못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노심초사하게 된다. 혼자서는 잘하는 일도 선배들이 지켜본다는
생각이 들면 머릿속이 백지로 변하면서 우물쭈물하게 되는것이다. 이럴때 실수를 하면 바로 선배들의 질책과 충고가 이어진다. 그 순간은 철저히 혼자가 되어 내편이 하나 없는 사움터에서 홀로 서있는 기분이 들 수 밖에 없다.
신규 간호사가 선배드에게 충고나 질책을 받는것은 하루에도 여러차례이다. 그럴때 마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서러움에 혼자서 눈물을 흘리기 일쑤이다. 초보시절 화장실이나 사람없는 곳을 찾아다니며 남몰래 눈물을 흘리지 않은 간호사는 거의 없을것이다. 이런 신규 간호사의 고달픔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탄다'라는 말. 한 마디로 타고, 타고 또 타는것이 신규간호사의 하루이다.
신규 간호사가 업무에 익숙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년 정도. 1년이 지나면 초보 딱지를 떼고, 선배 간호사에게도 후배가 아닌 동료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 과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 간호사의 이직률이 가장 높을때도 바로 입사한지 1년 미만의 기간이다.
이런 모진 세월을 이겨 내는 데 가장 큰 힘은 바로 프리셉터 선배와 동기 간호사 이다. 신규 간호사에게 프리셉터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수습초기에는 근무 시간도 조절해가며 일하기 때문에 가장 많은 시간 함께 지내는 선배이다. 신규에게 가장 많은 충고를 하는 이도 프리셉터 선배이며, 신규의 눈물을 가장 자주 닦아 주는 이도 프리셉터다. 함께 입사한 동기는 같은 입장에 있기 때문에 모르는 일을 가장 편하게 물을 수 있는 동지이자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관계이다.
이시기가 지나면 선배들이나 환자드에게 진정한 간호사로 인정받는 날이 올 것이란 확신을 갖고 발걸음을 제촉한다.
(권혜림 일산병원 응급실 간호사)
- 간호사가 말하는 간호사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