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내공 좋니?

by drimkim posted May 1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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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용어정리가 필요할 것 같다. 


환타: 환자 타는 사람 (수련 과정에서 운이 없어 당직 때 등 환자가 많이 오는 사람을 뜻함) 

유비무환: 비가 오면 환자가 없다 

평생 보는 환자 수는 같다: 운이 나쁜 사람은 전공의 때 환자를 많이 보고 정작 나중에 개업했을 때는 환자를 적게 본다는 뜻. 

내공: 병원에서 수련 중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환자 보는 운을 말함.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공이 안 좋은 사람은 지나가는데 CPR(심폐소생술)이 터진다. 심지어 짧은 여름 휴가 때 산에 갔는데 산에서 CPR이 터지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하기 위해 상견례를 하는 날 CPR이 터져서 못 갔다고 한다. 

내공이 안 좋으면 응급실 당직 때 밤에 환자가 많이 와서 밤을 새곤 하며, 낮에 주치의로 보는 환자도 중태에 빠지곤 한다. 


내공이 좋은 사람은 항상 여유롭다. 당직을 서도 환자가 적게 오고 콜도 적게 온다. 병원 전체가 편안하다. 낮에 보는 환자도 상태가 안정적이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곤 한다. 


턴이 바뀌면 꼭 윗년차들이 물어보는 말, 

너 내공 어때?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과학적이고 이성적일 거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담배 때문에 폐 다 망가진 사람들을 보는 호흡기 선생님이 담배를 피우시거나, 

술 때문에 간 망가진 사람들을 보는 간 쪽 선생님이 술을 정말 많이 마신다던지... 

감염 위험성이 있는 것을 누구보다도 알면서도 술자리에서 술잔을 돌린다던지...

내공이 안 좋은 사람을 기피하고 미워한다던지... 


내공도 사실... 과학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뭔가 있는 것 같다는 의심은 나도 버릴 수가 없었다. 


나 또한 정말 내공이 안 좋았다. 위에서 나온 예 중, 휴가 갔다가 산에서 CPR 한 사람이 사실 나이다. 

평소에도 어려운 환자, 중한 환자는 꼭 나에게 오곤 했었다. 그래서 그게 소문이 나니 나랑 당직도 안 바꾸려는 현상(당직을 바꾸면 내공도 따라온다는 속설이 있었다...)까지 생겼었다. 항상 지쳐 있고 까칠하곤 했던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당직 때 환자를 4명 보는데, 나는 매번 20명을 넘곤 하면... 이게 정말 과학적으론 설명할 순 없어도 뭐가 있는게 아닌지 강한 의심이 들곤 했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더 많은 경험이 되었고, 강한 트레이닝이 되었던 것 같긴 하다. 

전공의 시험 전날에도 당직 때 트렌스퍼 환자가 있어서 진주까지 갔다가 와서... 

남들은 시험 직전까지 열심히 문제집을 리뷰하고 있는데, 나는 거의 포기 상태로 허탈하게 시험장에 앉아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겪었던 희귀한 상황들이 문제 푸는데 도움이 되었고, 전공의 시험을 나쁘지 않게 치를 수 있었다. 


모든 일에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는가 보다. 내공은 나빴지만 지금까지도 나의 그 진귀한 경험들이 진료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